지리는 숙명이란 말이 있다. 지정학적 위치가 그 나라의 운명을 가름한다는 뜻이다. 동북아의 한·중·일, 세 나라는 각기 대륙·반도·섬나라라 그런지 한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각개전투 양상을 보여왔다. 작금에 들어 특히 그러한데, 이는 동북아와 같이 대륙국가와 반도국가, 섬나라 등을 모두 아우르고 있지만 하나가 돼 가는 유럽과는 판이한 모습이다.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지 못한 탓에 이런 결과를 낳은 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동북아의 트라블메이커는 일본이다. 한·중 양국을 침략한 과거가 있는데도 그들은 '평화의 시대'에 접어든지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사과 한번 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적반하장 격으로 오히려 과거 침략 사실을 미화하려 하고 있어서이다.  일본은 또 과거의 군국주의적 태도까지 드러내고 있다. 일본계 미국 역사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에서 "일본은 지금은 1930년대 군부 독재국가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국가일지 모르나, 그래도 총탄이 아닌 엔(yen)으로 아시아를 변함없이 지배하고 있는 점은 일본이 일본인 까닭이기도 하다"고 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총탄마저 꺼내려 하고 있는 듯 하다.
  "유럽연합(EU)의 현실을 보면 우리는 초조해진다"고 말하는 중국의 언론인 마리쳉(馬立誠)은, "중국과 일본은 아시아의 중심으로서 여러 가지 모순을 잘 해결한다면 아시아 전체의 발전을 이끌어갈 수 있다. 중국도 일본도 아시아와 어떻게 친밀해질 수 있을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기에 와 있다. 그 책임은 중대하다. 그렇지 않으면 아시아는 다시 처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토로한다.

  일본은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라 대륙의 선진문물을 금지옥엽처럼 여겼다. 그게 그들의 역사이고 문화였다. 조선 왕조에 대해서도 수시로 문을 열어달라고 간청했다. 스스로 문화의 생산지가 될 수 없었던 탓에 대륙 세력과의 교류의 창을 마련하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래서 박래품 또는 도래인에 대한 신뢰가 대단했다.
  일본인들은 9세기 중엽 견당사(遣唐使) 파견 중단으로 대륙과의 교류를 끊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말일뿐, 실질적인 거래는 중단되지 않았다. 당의 일본 침략 의도 저지라는 견당사의 원래 파견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되자 서서히 선진 학문의 수입 창구로, 그리고 무역 창구로 변하다 마침내 정치색을 띤 정부 차원의 교류는 중단하되 대신 민간 차원의 거래가 줄곧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 일본은 주변 바다를 폐쇄된 공간으로 여겼다. 대륙과의 연결고리라는 단 한가지 용도를 제외하고는.
  동아시아의 변방국가라는 위치는 일본인들에게 콤플렉스로 작용했다. 드디어 이를 혁파한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토요토미 히데요시(風臣秀吉)이다. 그는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변혁을 일으켰다. 당시 동아시아에는 명과 조선, 여진이 견제와 균형을 이루고 있던 터라 변방인 일본에 관심을 가질 형편이 아니었다. 그때를 타 일본은 경제적·군사적 힘을 길렀는데, 일본의 전국(戰國)시대란 오직 실력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이전투구 장에 다름 아니었으니 힘을 키우기에 그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전국시대 최고 실력자 히데요시는 그 첫 사업으로 조선반도를 침략했다. 그게 이른바 임진왜란이다. 그는 해양국가 일본을 대륙국가로 전환시키고자 했으며, 그 자신 이런 말로 세계 제국 건설의 야심을 드러냈다. "조선 정복은 중국 정복의 전주(前奏)이고, 중국 정복은 세계 정복의 전주다."
  그가 그럴 수박에 없었던 데에는 자신의 힘을 실현하기에 일본이란 나라가 너무 좁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조선과 중국 진출이란 형태로 나타난 것인데, 히데요시의 대륙 진출 야욕은 전쟁의 승리를 안겨주지는 않았지만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커다란 충격을 준 것만은 사실이었다. 천덕꾸러기 변방국가도 대륙을 지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 여파로 한(漢)민족 정통왕조인 명(明)이 무너지고 그 자리를 여진족이 세운 금(후일 청)이 차지하는 일이 벌어졌다. 다시 말해 16세기초는 변방민족이 중원국가에게 한방 먹이면서 질서를 재편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일본은 한때나마 대륙지향 국가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러한 대륙 지향성은 메이지유신 이후 다시 한번 불타 올라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는 불상사를 저질렀다.
  그 뿌리는 1880년 이후 등장한 정한론이었다. 그러나 정한론은 조선 정복으로 끝나지 않고 대륙으로까지 확대되었는데, 대륙은 일본이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던 곳인 만큼 '무주의 땅'도 아니었고, 그들이 우습게 볼 그런 곳도 아니었다. 그런 만큼 중국의 대응도 만만찮았다. 그런데도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했다. 그들과 같이 해양세력인 그 미국을 향해. 그런 만큼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그것도 오랫동안 쇄국정책을 집요하게 유지했던 그들 주제에.
  일본이 쇄국정책을 견지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전면적인 대외교류가 일본의 정체성에 혼란을 줄 수도 있거니와 조정이 아닌 지방자치체인 번(藩)이 자체적으로 외국과 상대함으로써 조정의 힘이 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일본은 네덜란드에게만은 상관 설치(1609)를 허용했다. 단, 조정의 통제하에 둔다는 조건으로. 당시 도쿠가와 막부가 네덜란드 상관(商館) 설치를 허가한 것은 네덜란드가 가톨릭 국가가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국가라는 점에서였다.
  일본은 나가사키(長岐) 주재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망원경, 현미경, 온도계, 수술도구와 같은 과학 기자재와 군사기술, 응용과학 기술 등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상관을 처음에는 서양물품의 거래소 정도로 취급했으나 날이 가면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문화의 창으로 이용했다. 그들의 서양 배우기는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이루어졌으니, 이렇게 축적된 지식을 '난가쿠(蘭學)'이라 불렀다.
  17세기는 '네덜란드의 시대'라 부를 만큼 네덜란드는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재미를 보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남미로부터 들어온 막대한 양의 은으로 하이퍼 인플레에 시달리는 틈을 타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해외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거기다 유고 그로티우스가 '해양자유론'이란 논문을 통해 네덜란드의 해외 진출에 이론적, 법적 근거를 제공했다. 해양에서의 자유 항행을 주장한 그로티우스는 1625년 '전쟁과 평화의 법'을 써, 국제법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국제법의 아버지'라는 영광을 안게 됐다.

  국제법이란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국가간의 규정에 불과하다고 본 일본을 본격적인 개국의 장으로 이끈 이는 미국 해군 제독 페리(1794-1858)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해양세력으로 나아가게 됐다. 이런 일본을 끝까지 후원했던 세력이 있었는데, 일본과 영일동맹(1902)을 맺은 영국과 태프트 카쓰라 협약(1905)을 체결한 미국이었다.
   도쿄만을 끼고 있는 요코스카(橫須賀) 시에는 푸른 바다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2300여 평의 규모의 페리 공원이 있다. 1853년 7월 8일 이곳 앞 바다에 검은 포함을 끌고 와 공포탄을 쏘아대며 일본을 향해 개항을 요구했던 페리였는데도 일본은 그의 상륙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우고 또 기념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메이지(明治)의 하사금으로 1901년 조성된 이 공원의 비문은 당시 최고실력자 이토우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썼다. 이곳에 페리 기념관이 세워진 1988년 이후 매년 7월 하루를 택해 페리 상륙 기념행사를 개최되고 있다.
  200년 이상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제한적인 방식이긴 하나 서구문물을 접하고 또 그들의 실력을 어느 정도 알게 된 일본이었지만 페리의 예기치 않은 방문과 개항 요구는 청천벽력이었다. 페리는 혼비백산한 도쿠가와 막부를 다그치지 않고 이듬해 봄 에 다시 올 테니 그때에는 분명한 입장을 보여 달라 하고는 떠나갔다. 막부는 다시 찾은 페리에게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며 카나가와 조약에 서명했다.
  그런 다음 재빨리 '서양 읽기' 작업에 들어갔다. 개항 7년째인 1860년에는 각계 인사 80여 명을 칸닌마루(咸臨丸) 호에 태워 미국으로 보냈다. 1862년엔 유럽에도 사절단을 파견했다. 단원들은 구미 열강이 이룩한 문물에 경탄을 금치 못했고 일본을 그 같은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그때 네덜란드 상관으로부터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제기됐던 '화혼양재' 슬로건이 다시 주목을 받았다. 이어서 천황을 우두머리로 하는 입헌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메이지유신도 단행됐다. 메이지가 페리 공원 건설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바다는 닫힌 세계이고 이동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그 반대다. 열린 세계이고 이동에도 용이하다. 그뿐만 아니라 공간감각과 국제감각, 인적 교류, 정보화 등도 선사한다. 일본의 농업 생산력이 성장을 멈추었던 그 당시 새로운 생산기술은 미처 개발되지 못해 어려운 시기라 외부로부터의 수혈이 필요했는데, 일본은 개국을 서두르게 됐다. 그런데 그 외부적 조건이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너무 달랐다. 그들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던 것이다. 흑선의 등장에서 메이지유신에 이르는 15년간 구미 열강은 하나같이 국내문제에 시달려 일본을 압박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항해 시대를 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남미의 원주민들의 저항으로 고전하고 있었고, 이탈리아는 통일전쟁 중이었다.
  일본 진출에 관심이 많았던 러시아는 크림전쟁에 패한 이래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감, 농노해방을 추진하는 등 국내문제로 손을 뗄 수 없었고, 이때 일본에 개국을 요구하던 미국마저 남북전쟁에 빠져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비교적 여유가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도 크림전쟁 이후로 일단 국내문제에 주력하느라 일본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일본은 이때를 맞아 자신의 진로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었고, 구미 열강에 시찰단을 보내 근대화를 위한 필요한 자료를 하나하나 챙겼다. 개국과 양이(攘夷) 문제에 대한 국론 통일도 이룩했다.
  1871년부터 73년에 걸친 2년 반 동안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를 둘러본 이와나미 시찰단은 신흥제국인 프로이센 왕국의 예를 따를 것을 건의했다. 그에 따라 메이지 일본은 헌법을 제정하고 국가기관을 설치하는 등 신국가 건설에 매진했다. 
  이 시대 일본이 저지른 최대의 실수는 탈아론(脫亞論)이었다. 1885년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가 주장한 탈아론은 아시아 제국을 후진국이라 치부하고 그들과의 교류를 중단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고자 한 것은 일본은 문명국이란 사실과 이들 아시아 제국을 지도할 수 자는 일본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탈아론은 서구 지향적이고 또 해양 지향적이었다. 그런 일본이 마침내 자신의 최대 후원자이자 모델이기도 한 미국을 공격했다. 그로써 2차 대전이 터졌고, 그건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되돌아왔다. '일본개조계획'의 저자이자 정치가인 오자와(小澤一郞)는 당시 육군은 러시아를 가상 적국으로, 해군은 미국을 가상 적국으로 상정했다며, 그게 일본을 전범자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치 리더십의 부재가 결국 군부 독재의 길을 내주어 그런 결과가 빚어진 것이라고 한다.
  일본은 대륙 세력을 지향하다가 갑자기 해양세력으로 돌아서는 등 그때그때 시대 상황에 따라 적당히 변신해왔다. 때론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는 위기를 맞는데도. 지금은 해양 지향적인데, 그렇다고 해서 대륙 지향적 자세를 버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지금은 대륙으로의 발톱을 감추고 있다고 보는 게 좋다.
  아무튼 지금의 그들로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든든한 지원을 받아야만 하는 데다 '해양법 시대'를 맞아 지금은 다시 해양세력으로 자리를 굳혔다. 이에 따라 배타적 경제수역을 설정한데 이어 독도의 영유권 시비나 센카쿠 (다오위타이)열도 문제, 북방 도서문제 등에 대해 발언권을 강화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동북아가 시끄러운 것도 이 때문인데, 과연 그들은 이 어려운 고비를 절도 있게 넘길 수 있을지 세계는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권삼윤(역사여행가)